노트폴리오
올해 나는 포트폴리오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 노트폴리오에서 총 네 번의 유료 인터뷰를 진행했다. 시간당 8만 원, 총 32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만난 멘토들은 우연찮게도 대기업 재직자 두 명과 중견 에이전시 재직자 두 명으로 나뉘었다. 그런데 모든 인터뷰가 끝났을 때, 나는 디자인 스킬에 대한 조언보다 더 서늘하고 충격적인, 어떤 ‘보이지 않는 벽’을 실감했다. 그것은 단순히 회사의 규모 차이가 아니라, 마치 서로 다른 종족을 마주한 듯한 기묘한 이질감이었다.
가장 소름 돋았던 지점은 대기업 멘토 두 명이 보여준 놀라운 유사성이었다.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는데도 불구하고, 그들은 마치 한 공장에서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똑같은 태도와 화법, 그리고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. 그 아우라는 개인의 개성이라기보단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훈련된 엘리트만이 가질 수 있는 정제된 자신감이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이었다. 반면 에이전시 멘토들은 각자의 스타일은 있었을지언정, 대기업 멘토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그 서늘하고 압도적인 ‘결’을 보여주지는 못했다.
이 차이는 시간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극명하게 갈렸다. 대기업 멘토들에게 시간은 철저한 비용이자 지켜야 할 계약이었다. 시작과 끝이 칼 같았고,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계산된 움직임이 느껴졌다. 특히 두 분 모두 배경을 블러 처리하고 나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, 이는 사적인 영역을 완벽히 소거하고 오직 ‘직무’로서만 소통하겠다는 무언의 선언 같았다. 그들은 나에 대한 사적인 질문도, 내 방 배경에 대한 언급도 일절 하지 않았다. 하지만 중견 에이전시 분들은 달랐다. 시간이 15분이나 남았는데도 “무슨 얘기를 더 하죠?”라며 흐지부지하거나, 반대로 기분에 취해 약속된 시간을 30분이나 넘기기도 했다. 심지어 내 외관이나 집 배경에 대해 언급하며 사적인 영역을 툭툭 건드렸는데, 대기업의 그 건조한 프로페셔널함과 비교하니 그것은 친근함이라기보다 공적인 선을 지키지 못하는 무례함 혹은 미숙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.
결정적으로 그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핵심 언어가 달랐다. 대기업 멘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‘문제 해결’이라는 단어를 꺼냈다. 그들은 나를 단순히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, 비즈니스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설계자로 대우하며 집요하게 ‘Why’를 물었다. 반면 중견 에이전시의 결론은 항상 “계속 디자인하세요”, “방 안에 갇혀서 더 많이 그려보세요”였다. 마치 생각은 하지 말고 손만 빠르게 움직이는 기능공이 되라는 주문처럼 들렸다.
32만 원을 쓰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. 내가 그동안 대기업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이유는 단순히 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. 대기업은 감성적인 아티스트나 가족 같은 동료를 원한 게 아니었다. 그들은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통제하고, 시간이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며, 감정이 아닌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, 사람 자체가 ‘명품’인 인재를 원했던 것이다. 그들이 보여준 그 차갑고도 깔끔한 아우라, 그것이야말로 내가 포트폴리오 한 장을 더 그리는 것보다 먼저 갖춰야 할 진짜 ‘자격’이었음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낀다. 그리고 그건 1년의 포트폴리오 수정으로 되지않지만 문제는 한국의 디자인과를 나온 학생들이 시간을 갈아넣는다는 것이다.